캄캄한 밤. 손을 뻗어도 잡히지 않는 별과 발목에 스치는 낮게 자란 풀. 똑같은 풍경만이 반복되자 단에겐 어제였는지 오늘인지 구분할 기준점도, 의미도 없어졌다. 단이 가진 최초의 기억은 이 길에서 시작됐으나, 그게 언제였는지는 몰랐다. 이 땅은 언제부터 달도 뜨지 않은 밤이었는지, 얼핏 보았던 세상이 밝았던 적이 정말로 있긴 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시간 감각이 흐릿해지자 자연스레 기억도 흐릿해졌다. 주저앉은 단, 울며불며 소리치는 단, 달려가는 단, 넘어지는 단…. 조각으로만 남은 기억들 속 단의 곁엔 누구도 아닌 목소리가 있었다.
“기억해, 단. 넌 새벽의 아이야. 동쪽으로 가. 저 멀리, 땅끝에 닿을 때까지.”
숨이 목 끝까지 차오를 때마다 물음을 참을 수 없었다. 왜 하필이면 단이야?
새벽(Dawn)이라니, 나와는 멀기만 한 단어 같은데. 새카만 머리카락은 지금 같은 때엔 밤하늘과 구분도 되지 않잖아.
눈물 고인 녹안이 잘게 빛난다. 땅끝은 어디에 있는데? 얼마나 멀리 가야 하는데?
정말로, 이 세상엔 단을 아프게 하는 것이 너무 많았다. 도무지 끝이 보이질 않는 이 길이, 들어차는 찬 공기가, 무엇보다도 사람의 부재가…. 입이 바짝 말랐다.
얼마나 이랬더라. 얼어붙은 몸을 이끌고 나아가는 것도 한계가 있다. 온기가 고팠다. 간절하게.
그러나 기대까지는 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허공에 너절한 언어를 늘어놓으면서도 대답을 기대한 적은 없었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주변엔 아무도 없었으니까. 목소리는 메아리 같은 것이었다. 단의 작은 머리통 안에 갇혀 그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 사람이라고 생각조차 하지 말라는 듯, 맴돌던 목소리는 기계처럼 같은 말만 반복했다. 새벽의 아이, 동쪽, 땅끝…. 지긋지긋한 운명.
그러다 단이 알게 된 것 하나, 변화는 늘 급작스럽게 다가온다.
소나기가 내렸다. 어두운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든 지도 몰랐다. 세찬 빗줄기에 목소리도 조용해진 참이었다. 축축하게 젖은 몸으로도 어떻게든 계속 걸으려던 단은 고인 빗물에 발이 미끄러져 넘어졌다. 도저히 일어날 힘이 나지 않아 주저앉아있는 단에게 기적처럼 손길이 내려왔다.
“여기서 뭐해?”
아주 오래된 규칙이 깨지는 것도 순간이다. 단의 앞엔 밝은 금발의 소녀가 서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홀로 빛나는, 돋보이는, 아름다운…. 한참을 머뭇거려도 적절한 수식어를 찾을 수 없었다. 그 애 같은 건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그 애 말고는 누구도 본 적 없었다. 쓰러져 있던 단을 일으켜 세우며 소녀가 물었다.
“내가 도와줄게. 무슨 일이야?”
“길을 잃었어.”
울렁거리는 속과 일렁이는 시야를 다잡으려 애쓰는 사이 말이 나왔다. 단도 모르는 사이에.
“동쪽으로 가야 해.”
둘, 빛이 있으면 길을 찾는 것도 어렵지 않다.
“같이 가자! 난 이즈야. 길을 알고 있어.”
자신이 믿는 바에 확신을 가진 사람만이 낼 수 있는 목소리였다. 그저 사실을 전하는 것뿐이라는 듯 어떤 것도 더해지거나 빠지지 않은 담백한 말. 이즈는 가볍게 단을 일으켜 세웠다.
“내 이름은 단이야.”
맞잡은 손이 따뜻했다. 바람이 시원하게 볼을 간질이고, 다리가 깃털처럼 가벼웠다. 아주 오랜만에 닿은 타인. 따뜻한 감각. 새벽 어스름 속 샛별처럼 빛나는 이즈. 이상하지. 너와 함께라면 정말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런 기분이야.
그저 기분 탓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이즈의 발걸음엔 망설임이 없었다. 수풀을 헤치고 나아갈 때도, 주위에 이정표 삼을 만한 게 아무것도 없을 때도. 한 번도 주저하지 않고 앞을 향해 달렸다.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복잡한 단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즈는 이따금 뒤를 돌아보곤 “말했지? 난 길을 안다니까.” 하며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 애가 웃을 때면 세상이 밝아지는 것 같았다.
그럼 이즈가 사라지면?
“자, 잠깐만.”
단이 이즈의 손을 뿌리치고 뒷걸음질 쳤다. 발걸음을 멈춰 세운 건 밤도, 들판도, 이즈도 아닌 단 자신이었다. 정확히는 두려움이었다. 단은 이즈를 잃을까 두려웠다. 흐릿한 별빛에 의지해 길을 헤매던 캄캄한 밤이 다시 찾아올까봐. 형체 없는 두려움이 추위를 두르고 단에게 다가왔다.
“왜 그래?”
“나, 다시는 이 길을 홀로 헤매고 싶지 않아.”
“괜찮아. 넌 이제 혼자가 아닌걸.”
이즈를 만나기 전 단은 어땠더라? 정처 없이 걷는 떠돌이, 온기를 그리워하며 벌벌 떨던 외톨이. 상처 입은 어린 짐승의 모습이었다. 과거가 된 모습이다. 단은 이제 혼자가 아니다.
“네 말이 맞아, 이즈.”
웃음이 나왔다. 뭘 무서워했던 거지. 네가 내 앞에 있는데. 단의 손을 잡고 마주 웃은 이즈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단의 눈앞에서 햇살처럼 노란 머리카락이 춤추듯 허공에 흩날렸다. 함께 밤을 가르는 둘 뒤로 웃음소리가 뒤따랐다.
얼마나 달렸을까. 드넓은 벌판에 끝이란 건 역시 없는 듯해서, 멀리 보이는 지평선에 영영 가까워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단은 두렵지 않았다. 이즈가 빛나는 탓인지 정말 새벽에 접어든 건지, 세상은 이전처럼 어둡지 않았다. 단은 또 한참을 멈추지 않고 달렸다.
어느새 단과 이즈는 같이 발을 맞춰 뛰고 있었다. 단의 앞에 이즈가 있지 않아도 괜찮았다. 둘은 여전히 손을 맞잡은 채였고, 단이 조금만 고개를 돌려도 이즈의 웃는 얼굴을 볼 수 있었으니까, 두렵지 않았다. 그리고 단은 깨달았다.
마지막, 해 뜨기 전 하늘이 가장 어둡기 마련이다.
먼동이 텄다. 이즈가 이끌고 온 여명이 둘을 비추고 있었다. 붉은 빛이 하늘을 가득 물들이는 데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길고 긴 새벽이 지나고, 아침이 오고 있었다.